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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문화인류학

(독후감)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한국문화인류학회, 일조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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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514163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문화인류학 여행다양한 문화의 현장을 살펴보는 문화인류학 입문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개정증보판.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해외의 저명한 학자들의 논문과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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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이상적인 인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인생의 활동범위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었다. 첫번째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직장인>의 영역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가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창작인>의 영역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굉장히 '중2병'스럽다.
 첫번째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영역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 전공분야인 민속학 분야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속학 분야의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주제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는 이것이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문화연구자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이다. 여성할례와 남성할례, 그리고 인도의 지참금 살해와 같은 풍습을 보자.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 중 일부에게는 "마땅한"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지만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게는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생명의 위협을 안겨주는 일들이다.
 이러한 풍습들을 보고, 1) 그것은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들의 가치관과도 일치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2) 단지 범죄일 뿐인가?
 인도의 지참금 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이 책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면, 1980년대 인도의 결혼풍습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부측 집에서 지참금 명목으로 돈이나 보석, 각종 재화를 함께 보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지참금의 액수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신랑 쪽 집안 사람들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책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1988년에 뉴델리 동쪽의 한 마을에서 수니타라는 여성이 죽었는데 그 원인은 화상이었다. 누가 불을 붙였을까? 남편이 수니타를 뒤에서 잡고 시어머니가 등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이유는 지참금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1980년대에 지참금 살해를 법으로 금지하고, 지참금 자체를 불법행위로 규정한 법이 만들어졌지만 사실상 효력이 전혀 없고, 단속도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에서는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여성들이 죽는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203_0012697002&cID=10102&pID=10100

 

 할례는 어떨까? 여성의 할례만을 예로 들어보자. 할례는 중부이북 아프리카지역, 아라비아 반도 남부, 인도, 인도네시아 등에서 행해지는 풍습으로, 여성의 성기 일부를 잘라내거나 봉합하는 풍습이다.  할례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 이유도 종교적 이유에서부터 관습적 이유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는 여성의 성감대를 제거함으로써, 결혼하기 전까지는 여성의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간음을 막는다는 목적도 있다. 여성을 성적으로 둔감하게 만듦으로써 문화적 일탈을 막으려는 것이다. 또한 할례는 통과의례적인 측면도 있어서 할례를 받지 않는 여성은 어린 아이 취급을 받는다. 한국에서 '고래를 잡지 않은 남자'나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남자를 어린 남자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당사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해지는 고통들을 단순히 "그들 문화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라고 단순히 넘어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생긴다. 그들도 그들의 문화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도 우리의 문화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간섭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보편적인 기준이란 것을 찾을 수는 없을까?
 나의 학문수준이 미천하여 더 깊은 논의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문화상대주의를 확대해석하여서 모든 풍습에 들이대면 큰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 범죄,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며 단순하게 결론지어버리는 문제점을 가진다.
 내가 보기에는 학문의 영역을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인류학자는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하여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최대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을 대중들에게 알림으로써, '부조리'한 관습에 대한 토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토의는 문화 내외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존에 당연하게 여겼던 풍습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점차적으로 그 문화는 변화하게 된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과 경제권의 확대로 인해 문화 간의 상호작용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단순히 과도한 '간섭'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호기심과 궁금증이라는 인간 욕구의 발현이다.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에게 자신의 기준을 알리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문화연구자는 그러한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상한' 풍습을 만난다면 일단은 충분히 지켜봐야 한다. 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지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러한 풍습을 지키고 있는 지 분석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문화연구자의 영역이다. 문화연구자의 연구성과는 그 '이상한' 풍습에 대해서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 간의 소통과 토론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물론 그 풍습을 개조하려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고, 이에 대한 반동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또 다른 사고방식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문화는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연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행위가 된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스스로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진정으로 사람들의 풍습을 바꾸는 것은 다양한 관점이 한 곳에 만나서 이뤄지는 토론과 토론을 통한 그들의 주체적인 결단이다. 문화연구는 좋든 싫든 이러한 과정에 속하게 되는 정치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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