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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문화인류학

(독후감) [피에르 부르디외] (김동일,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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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493182 

 

피에르 부르디외

피에르 부르디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상관관계를 따진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물질 생산(경제), 지배와 저항(정치)의 영역에 해당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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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사회학 사상에 대한 책을 읽으니, 뇌에 찬바람이 부는 기분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부르디외인가? 개인적으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이 때까지 내가

1) 민속학을 하는 사람
2) 인간답게 벌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분투하기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이며
3) 일상에서의 감상을 잡다한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

 라고 생각해왔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써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나저나 2번과 3번은 대충 알겠는데, 1번에서 민속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민속학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속학을 하는 사람은 무슨 사람인가? 사실 평소에 민속학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지 않고 당면한 과제만 하며 적당한 대답을 만들어내왔기 때문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적당히 "인간들이 마치 공기와도 같이, 아주 당연한 듯이, 그 안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민속에 대한 당연하지 않은 이유를 묻고 연구하는 행위" 를 나는 "민속학 하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민속학을 해야하는 어떤 절체절명의 이유 같은 것은 나에게 없다. 그냥 하다보니 나와 맞는 것 같아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대로 민속학을 '한다면'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서 사회적 차원에서 민속학 하기는 어떠한 효용을 가지고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해보았다.
 아무튼, 위와 같은 이유에서 당연한 것에 대한 당연하지 않은 이유를 파헤쳐왔던 수많은 석학들에 대해 공부할 이유가 매우 충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민속학을 좀 더 '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달리기를 잘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부르디외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 위대한 학자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대해 정리한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여, 부르디외의 저작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부르디외의 이론을 잘 정리해주신 김동일씨의 책을 읽은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193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역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다. 그는 1955년 징집되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복무하게 되는데, 이 후 알제리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35살에 교수가 되었고, 적극적인 저술활동과 사회참여로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가 되었다. 아비투스, 장, 상징투쟁, 문화자본 등 그가 제안한 개념들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를 사회학자와 인류학자라는 두 가지의 지위로 부르는 것은 아마도 위의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저작들 자체가 사회학적, 인류학적 통찰력을 모두 겸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라고 한다.
 라고 나무위키에 써있었다. 그의 이론은 종종 한국의 신문에서도 종종 인용될 정도로, 내가 못 알아봤을 뿐이지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이론들이다. 최근 한 국회위원이 급식노동자들에게 '밥 하는 동네 아줌마' 라고 불렀던 사건을 논평할 때도 인용되고, 한 피자 프랜차이즈 회사의 회장이 갑질논란에 휘말렸을 때도 인용되었다. 아래에 모두 링크를 걸어두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장'이라고 하는 사회적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과학장, 문화장, 교육장 등 여러가지 장이 있으며, 우리가 강의를 듣는 강의실도 장이 될 수 있다. 팬클럽도 하나의 장이 될 수 있다. '장'에 속한 사람들은 특수한 내기물을 걸고 투쟁한다. 즉, 타인의 인정이나, 오직 그 '장'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보상(챔피언 트로피, 올해의 우수회원, 연기대상 등)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바로 '장'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장에서 내기물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장 외부의 자원을 확보하여, 장 내부로 끌어들이거나, 장 속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다거나.. 부르디외의 사상이 탄생한 것도, 부르디외가 '사회학 장'에서 인정되는 내기물을 얻기 위해 투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큰 사회 속에는 수많은 장들이 있고, 이 장들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서로를 잠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비투스란 또 무엇인가? 아비투스란 간단히 말해 습관을 말한다. 그런데, 잘 때 눈을 뜨고 자는 습관이나 다리를 떠는 습관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습관의 차원을 넘어선 습관을 말한다. 아비투스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현되는 하나의 행동양식이며, 몸에 스며들어버리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속 가능하고 변환 가능한 성향의 체계, 즉 구조들의 구조화 기능을 수행하도록 예정된 구조화된 구조"이다. 즉 아비투스는 "불평등한 관계에서 발생하며, 아비투스를 체화한 행위자들의 실천은 이러한 불평등을 생산하는 객관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나무위키 인용)아비투스는 실천을 발생시키는 원칙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구조이면서도 과거에 존재했던 구조들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  아비투스는 개인에게 내재화된, 개인의 몸에 쌓인 계급적 취향이며, 아비투스를 공유한 집단을 부르디외는 계급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습관, 자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는 습관, 자우림의 노래를 들으며 그것을 미학적으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고 "크~좋다." 라는 말을 하는 습관들이 단순히 개인적인 나의 성향이라기 보다는 계급적 취향이 나의 몸에 내재되어버린 하나의 아비투스인 것이다. 아비투스를 가지고 계급을 정의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한가지 더, 그는 자본의 종류를 경제적 자본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문화적 자본으로 확장했다. 문화적 자본이란 단순히 예술과 고급문화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능력, 악기를 다루고 그림을 그리는 기술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문화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으로 전환되기도 하고, 경제적 자본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특수한 문화적 자본도 있다. 내가 돈이 한 푼도 없는데 1억씩 하는 하프를 켜는 법을 배우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계급의 구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는 문화자본은 농업노동자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나, 경제자본에서는 그다지 우월하지 않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 
 그리고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자본은 계급 사이의 구별짓기를 유발하게 되고, 이 사회적 구별이 공동체 간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들 사이의 구별짓기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제적 자본을 문화적 자본으로 얼마나 전환하였는가에 따라 다른 차원의 구별짓기가 행해진다.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문화적 자본인 나와, 직접 요트를 구매해 요트를 운전하는 문화적 자본을 가진 어떤 부자 사이에는 문화적 자본의 양에 의해 구별짓기가 행해지고,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계급적인 차원의 구별짓기라는 것이다.
 음.. 아마도 부르디외씨는 이러한 주장을 하신 것 같은데, 솔직히 내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디까지나 내가 이해한 내용이니, 자세한 것은 책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어떤 아비투스들이 체화되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계급적 아비투스일까. 그리고 나는 평소에 어떠한 구별짓기를 행하고 있는가.. 나는 여태껏 내가 가진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어떻게 서로 전환하여 왔는가.. 등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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