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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지식재산과 발명

(독후감) [큐리어스 Curious] (이언 레슬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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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어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호기심의 모든 것!‘칸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칸지는 상징 기호들로 이루어진 키보드를 조작해 연구원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능이 두 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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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부터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이었다면, 호기심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노트에 "~에 대해 알고 싶다.", "~의 원리에 대해 알려주세요." 라는 말을 수 없이 썼다고 하는데, 나는 일기장에 그런 말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을 때 보다는 귀찮음과 지루함, 권태로움에 차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삶에 재미도 없고, 솔직히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도 거의 한 적이 없다. 

 내 삶이 재미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나는 내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하다는 답이 나왔다.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별로 없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으니, 딱히 무언가를 노력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별로 없으니, 사람들과 약속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그저 그런 뻔한 인생을 살다가 죽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일테니까 말이다. 내 인생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할 이유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열심히 만들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왜 그렇게도 호기심이 없었을까? 나는 그것이 내가 게으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충족되고 만족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끈질김이 많이 필요하다. 책을 뒤지던, 인터넷을 뒤지던, 누구에게 물어보던 아니면 하루 종일 고민을 하던 어떻게든 답을 찾아가려는 끈질김 말이다. 그런 끈질김이 없다면 호기심이 충족되는 짜릿한 기분도 만끽하기 힘들다. 물론 그다지 끈질기게 매달리지 않아도 해결되는 호기심도 많지만, 그럴수록 호기심이 해결됐을 때의 즐거움도 일시적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대충 이런 이야기다. 호기심이란 무엇이고, 왜 중요하며, 어떻게 호기심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것인가?

...

  장 피아제는 "호기심이란 세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생각한다면 호기심의 범위는 너무 넓다. 예컨데, 지금 배가 고파서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00분 토론의 주제로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 라는 질문이 등장했다고 하자. 이것도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화가 난 사람을 바라보며 "저 사람은 왜 화가 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이것도 호기심이다.


  이 책에서는 호기심의 종류를 다양성 호기심, 지적 호기심, 공감적 호기심으로 구분한다. 다양성 호기심이란 새로운 것, 혹은 어떤 것의 다음 단계를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을 말하며, 지적 호기심은 이러한 다양성 호기심이 방향성을 갖고 더 깊어지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발전한 것을 말한다. 한 편, 공감적 호기심이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관해 갖는 호기심이다. 즉, 다양성 호기심이 좀 더 깊고 장기적인 것으로 변하면 그것은 지적 호기심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양성 호기심만 가지고 산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호기심에서 다음 호기심으로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피상적으로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될 것이다. 웹 서핑을 예로 들어보자. 재미있는 이미지가 올라오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내가 접속했다고 하자. 나는 한 게시물을 보고 웃고, 다음 게시물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것은 다양성 호기심의 수준이다. 그러나, 누가 대머리를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린 것을 보고 내가 "한국 사회에서 왜 대머리는 놀림거리가 되는가?" 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고 하자. 나는 이것을 한 학기 동안 끈질기게 이 문제를 탐구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비판했다. 이것은 지적 호기심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대머리인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분노에 깊이 공감하며, "어떤 기분일까?" "나라면 어떤 심정일까?" 같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것은 공감적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호기심이 가득한 사회, 그 중에서도 피상적인 다양성 호기심이 아닌 지적 호기심과 공감적 호기심이 확산되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 다양한 학문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며, 산업 분야에서도 혁신이 더 쉽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사회제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이것이 제도의 개선으로 이어져 많은 시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이 밖에도 호기심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키울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백년 전 루소가 그의 저서 <에밀>에서 이야기했던 진보적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비판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이른바 "진보적 교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홀로 배우는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면 오히려 그 호기심을 죽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단지 아이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호기심에 단지 불을 지피면 된다는 생각이 매우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불을 피우려면 연료가 필요하지 않은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호기심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 간의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의 지식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 호기심이 솟구치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죽이는 것이다.


  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 호기심을 발전시켜 지적 호기심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뛰어난 교사의 지도가 필수적이다. 아이들이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도와주고, 그것을 끈기 있게 추구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로 똑똑하고 아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기만 하고 시험을 통해 당근과 채찍을 주며 지식이 더 잘 흡수되도록 하는 방법만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에 따르면, 루소의 <에밀> 이 후, 진보적 교육은 이름을 달리하며 수백년간 제기되어 왔다. 그 때마다 진보적 교육은 마치 획기적인 시도인 양 등장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것이 곧 진보적 교육이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아이들이 가진 궁금증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그것이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중산층이나 부유층의 아이들보다 질문하는 능력이나 호기심이 뒤쳐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교육이 소극적으로 변화하여 단지 아이들의 호기심을 뒤에서 부채질하는 것에 그친다면 어떻게 될까? 중산층과 부유층의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과 이야기할 시간이 훨씬 많고, 그들의 부모도 교육수준이 높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들의 호기심은 가정에서부터 발전해 오며, 학교에서도 훨씬 뛰어난 성취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양성 호기심이 새로운 자극의 순간적인 섬광이라면
지적 호기심은 울퉁불퉁하더라도 계속해서 가보고 싶은 길이다.
행복이란 그러한 목표를 추구할 때 곁다리로 딸려 온다.
끈기, 투지, 참을성, 자기 규율 등 성격적 측면이 지능보다
학업적 성취를 더 잘 예측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흥미를 덜 갖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다.
행복이란, 흥미로운 일들이 자신의 외부에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배울수록 느리게 잊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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