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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를 찾아서

포항의 지역 문화재 <영일 냉수리 신라비> 방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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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

포항냉수리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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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한국사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2번째로 오래된 비석이다)
궁금하니까 한 번 직접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영일 냉수리 신라비란 무엇일까?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제264호. 건립 연대는 계미년()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항 냉수리 신라비 [浦項冷水里新羅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굉장히 자세히 나와 있다. 참 좋은 백과사전이다.
아무튼, 최소 1500년 전에 지역에 살던 신라인들이 돌을 쪼아 만든 비석으로써, 내용은 재밌게도 재산다툼이다.
나는 비석하면 광개토대왕릉비처럼 영토확장과 국가의 위대함을 거대한 돌에 새겨넣는 것만 생각했는데,
재산다툼(?)이라니 조금은 귀엽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종이(?)는 커녕 목간이나 죽간도 많지 않았을 테니, 재산분쟁의 판결결과를 이렇게 돌에다가 새기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적절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 죽간이나 나무에 새기면 태워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돌에 새기면 쉽게 없앨 수가 없다. 


어쨌거나, 일단 버스를 타기로 한다.

 


100번 버스(까먹을 수가 없는 번호다.) 를 타면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의외로 가까워서 놀랐다. 그러나 배차간격이 40분 가까이 되기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타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타 죽으면 냉수리 신라비를 못보기 때문에, 잠시 피씨방에서 쉬다가 버스를 탔다.

목적지에 가까워올수록 회색보다는 녹색이 지배적이다.

 한 30분쯤 버스에서 다시 한국사 자격증 책을 폈다.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을 폈다면 좀 더 느낌이 있었을텐데. 아무튼 나는 지증왕의 업적을 외우며 시간을 보냈다. 알아본 바로는, 냉수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갈문왕이 바로 지증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왕은 재산분쟁에도 깊이 관여했나보다. 재밌는 것은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이 6명의 사람들도 모두 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왕권이 그렇게 강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런데, 그 재산이 대체 무엇이길래? 왕까지 참여해서 재판을 하고 결과를 돌에 새기고, 그 뒤에는 소를 잡아 제사까지 지냈던 것일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다.

신광면사무소에 도착했다. 할머니집 풍경과 유사하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면서 올라가면 덜 덥다.

면 사무소에서 이 비석을 관리하고 있다고 해서, 일단 면사무소를 찾아간다. 멀리 보이는 면사무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올라갔다. 너무 더워서 이러다가 냉수리비를 보기 전에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해보니 공원처럼 주변이 꾸며져 있고, 전각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유리 곽에 들어있기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나무창살에 가려져 있어서 가까이서 볼 수는 없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냉수리 비를 위해 기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알찬 설명이 인상적이다. 대체로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는 설명이다.

손을 뻗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cctv는 물론이고 도난 방지장치가 굉장히 잘 구비되어 있어서 흠칫했다. 그러나 살살 잘 피해서 사진을 찍도록 하자. 자세히 보면 글자가 빼곡하게 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이 무엇이었길래 1500년 전에 이렇게 비석에까지 재산분쟁 내용을 새겨야 했을까?

특이한 것은, 이 비석은 앞면에만 글자가 있는 게 아니라, 윗면과 뒷면까지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다. 윗면에도(?) 쓰다니, 우리가 돈이 없으면 양면인쇄를 하듯이 이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심지어 윗면은 다듬지도 않고 그냥 새겨넣었다.

도서관이 있어서 그냥 찍어보았다.

냉수리 신라비


막상 도착해서 둘러본 시간은 30분도 안된다.
그러나, 무려 1500년이나 된 <국보>가 근처에 있었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비석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 옛날에 재산을 두고 어떻게 싸웠을까. 욕은 했을까.(?)
아마 그 중에 한 명이 화가 나서
<그럼, 높으신 분들께 한번 물어보고 결정되면 돌에 새겨버리자. 그럼 시비걸기 없기 ㅇㅋ?>
라고 말하

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킥킥 대면서 집에 와서 다시 한국사 공부했다.

분쟁조정이 끝나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우리가 친구끼리 싸우고 나서 화해의 의미로 짜장면이나 국밥을 먹으러 가듯이
아마 그런 느낌으로 소를 잡아서 같이 나눠먹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추측도 한번 해본다.

물론 잡생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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