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점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산하 작가의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기계발서인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생태학자인 저자가 우리의 일상을 생태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식당, tv프로그램,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축제장 등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것들에서 반생태적인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물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폭력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tv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이 역설적으로는 실제 정글의 법칙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상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삶의 지향점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라고 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국립공원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고 싶다. 단순히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 국립공원이 진정 야생 생물들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가 보다 친생태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사람들이 자연과 더 이상 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선 나부터 자연을 바람직하게 누리며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 얻은 깨달음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잘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내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겠다. 부엌 서랍게 잠들어있던 텀블러를 다시 꺼내야겠다. 환경운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내가 환경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일상에서부터 열심히 실천해야겠다.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계발서도 아닌데, 삶의 방향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인상깊었던 내용 발췌
-(186p) 나라가 자연을 등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을 등지기 때문이다. 전원 풍경을 머금으며 자란 세대는 줄고 있고, 클릭과 터치로 사는 세대는 늘고 있다. 논두렁과 골목을 탐방하며 자라던 아이들은 화면과 게임에 오감을 바치며 성장하고 있다. 자연은 낯설고 불결하고 불편할 뿐인 자가 대다수인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는 끈 떨어진 풍선처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의 저자 리처드 루브는 환경 파괴보다 훨씬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아이-자연 연결 고리의 파괴를 경고한다. 그는 이를 일컬어 자연 결핍 장애라고 진단한다. 여기서 장애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자연과의 단절은 하나의 장애이다.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 근본적인 장애로 인해 언젠가는 우리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는 때가 올지 모른다. 그 때가 되면 환경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지 몽비오의 말처럼 "자연과 연결의 끈을 잃은 아이들은 결국 자연을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180p) 오늘날 한국이라는 실체를 구성하는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중략) 첫 번째는 미래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인생의 모든 시기는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잘 쓰였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고등학교는 대학교를 위해 완전히 복속되는 기간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략) 대학은 잠시 '대학 생활'이라는 시기를 갖지만, 곧 취직을 위해 헌납된다. 어렵사리 취직에 성공해도 현재를 즐길 여유는 없다. 승진하려면 지금 더 성과를 내야하고 또 다가올 결혼 준비에 오늘 박차를 가해야 한다. 결혼 후에는 출산, 출산 후에는 교육, 교육의 두 번째 바퀴가 시작된다. 그리고 노후. 자동차나 부동산을 살 때에도 나중에 팔 때의 가치가 구매 결정에 1순위 기준으로 작용한다. 미래의 그림자가 너무 큰 나머지 현재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두 번째는 연결이다. (중략) 모든 국민은 자신의 통신 단말기에 고개를 처박고 하루를 보내며, 차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인터넷 콘텐츠를 매일 산소처럼 소비하며 산다. 연인들은 상호간의 연결 상태를 아예 끊는 법이 없이 깨어있는 시간은 거의 모두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는다. 어쩌다가 안테나나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 들어서면 마치 공기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듯한 공포와 불안감에 떨며 모두들 어머니 품과 같은 전파신호를 찾는 데 여념이 없다. (중략) 어디서 뭘 하든 그 활동은 페이스북에 올려야 완성된다.
세 번째는 변화다. 한국에서 나오는 광고의 절대다수는 "아직도 oo를 하고 계십니까?"로 소비자를 훈계, 설득, 협박한다. 멀쩡히 사용하고 있던 물건이나 서비스라 하더라도 가만히 옛것에 머물러 있다면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다.
(중략)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세 가지이다.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에 신음하는 지구를 구하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오늘을 벗어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또 인간은 자연과 생태계의 커다란 그물망에 모두 연결된 상호 의존적인 신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수습 불가능해지기 전에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지구와 환경을 걱정하는 모든 활동가와 단체는 이 세 가지를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야말로 지구를 구하는 데 제격인 사람들이 아닌가?
-설악산 케이블카 논란은 개발과 보전 간의 대립 이슈가 아니다. 국토의 5~6퍼센트에 불과한 국립공원은 다른 데는 지지고 볶더라도 여기만큼은 자연에 맡겨두기로 우리가 결정한 공간이다. 겨우 벼룩의 간을 떼어주고도, 이제는 그것마저 손대겠다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하는 마지막 선을 넘는 행위요, 반 생명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히는 행위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케이블카 설치가 노인 및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오류다. 그들보다 훨씬 약자인, 단순히 교통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 차원의 약자인 동식물의 권리가 우선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국립공원이다.
-세계에서 현재 일곱번째로 많은 탄소배출량으로 기후변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나라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일관성이 부족해도 좋은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렇다. 대쪽 같은 일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용인될 수 있고, 다소 모순되는 면이 있더라도 좋다. 한 가지라도 아끼고, 보호하고, 경감시키려는 노력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언제나 낫기 때문이다. (중략) 일관되게 반환경적인 사람보다는, 비일관되게 친환경적인 사람이 낫다.
-진정으로 생명을 존중하려면 뭇생명을 다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인간에게만 협소하게 적용시키면, 인간을 위해 다른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럴 경우 생명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여기지 않은 채, 급할 때 자기 목숨만 구제하려 하는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쉽다.
-학교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직업세계의 맥락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위가 벌어진다. 월급을 받기 때문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해야만 하므로 기본적으로 일을 해치워 없애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무언가의 실질적인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략)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업무 기준이다. 물론 너무 잘 해도 안 된다. 너무 신속하게 해내면 더 많은 일거리가 쌓일 뿐이니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느긋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다. (중략) 일은 어떻게든 남에게, 성과는 어떻게든 나에게 돌아가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동물적이라는 수식어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인다. 욕설이나 비방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게 동물이다. (중략) 예의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짐승같은' 짓이며, 우리의 고결한 '인간성'은 저열한 '동물성'과 확연히 구분되는 무엇이다.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고, 동물만도 못하다는 것은 최악의 욕이 아니던가.
-(중략) 물고기가 몸을 돌릴 수조차 없이 꽉 찬 광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대게와 광어가 물건처럼 포개져 쌓여 있지만 엄마, 아빠는 싱글벙글하기만 한다. 고깃집 간판에는 닭, 돼지, 소가 각각 스스로의 살코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뽐내듯 입맛을 다시며 엄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추켜세우고 있다. 심지어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대신 촉수를 지닌 낙지조차도 어떻게든 엄지를 만들어 세워 자신의 살을 권하는 경우도 있다. 먹히는 자가 맛있어 하는 이 괴기스러운 모순은 그저 하찮은 디테일로 치부될 뿐 식당을 선정할 때 여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립공원과 같은 공간은, 말하자면 동식물이 '원주민'으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구획된 공간이다. 인간은 엄연한 '방문자'이다. 비자에 해당하는 입장권을 잘 보유하고 법에 해당하는 등산규칙을 잘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만 체류가 허락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추방'될 수도 있다. 산에 오를 땐 마음껏 정상에 오르고 "야호"를 외쳐도 좋다. 하지만 천하를 얻은 듯한 마음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뿐, 산의 시민권을 얻은 것은 아니다. (중략) 엄연히 방문하는 쪽은 인간인데도 '생태적 무법자' 따위의 칭호가 붙는 대상은 이상하게도 동물 주민이다. 멧돼지의 천적을 제거하여 개체군 조절 체계를 망가뜨린 게 누군데, 우리는 그들의 번식에 불편해하며 가끔씩 민가로 내려오는 대체를 '불법 체류자'로 취급하기만 한다. (중략) 자신의 보금자리 근처에서 발견한 배낭과 침낭 그리고 잔반통을 '습격'한 죄로 이 곰은 '자연적응 실패'라는 억울한 누명과 함게 포획당할 가능성에 처해버렸다.
-곰표, 토끼표, 노루표, 캥거루표, 제비표 등 무척이나 다양한 업종에서 동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특정 회사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다. (중략)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본 피해자들이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기본적으로 자연 자원의 활용을 의미하고, 그 귀결은 아주 단순화하면 야생동물의 서식지 교란 또는 파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생동물은 자신들의 안녕에 반하거나 최소한 안녕과 무관한 기업의 상징으로 아주 흔히 사용되고 있다.
-(중략)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말하는 교감은 가령 이런 식이다. 아이들이 어느 수족관에 가서 돌고래와 '친구'가 되는 내용인데, 돌고래들은 '환영 인사'로 꼬마들을 '반기며' 그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돌고래는 '함께 놀자'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완벽한 교감'을 나눈 나머지 뽀뽀까지 한다. 물론 이 모두는 돌고래의 의사와 무관하게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자막일 뿐이다. 당연히 돌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이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이 돌고래들은 야생에서 잡혀와 좁은 사육장 안에 갇힌 신세로, 자유의지에 의해 제작진 및 출연진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음침한 푸른빛의 형광등으로 곤충을 유인해서 전기로 죽이는 기계는 요즘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틱, 틱, 하는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알리는 이 흉측한 기계 밑에는 다양한 곤충의 사체가 덩그러니 널린다. 물론 모기와 같은 이른바 해충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공원에는 왜 안 설치해주냐고 민원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퍼런 사형장 덩북에 모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는 아무도 없으며, 이것이 모기만 골라 죽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방과 하루살이까지 무더기로 희생됨으로써 새나 박쥐 등 다른 동물의 먹잇감만 감소시킬 뿐이다. (중략) 잠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공원의 산책로에서 자연이 죽는 소리가 들려서는 안된다고, 야생학교는 말하고 싶다.
-건물이나 담, 또는 그 밖의 인공물이 없는 땅을 가리켜 우리는 그 땅이 '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고, 돌 위에는 잠자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놀고 있다. 버섯이 포자를 터뜨려 보내고,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는 곳이지만, 놀고 있다. 광합성에 의해 탄소가 저장이 되고, 물과 무기물이 토양에서 순환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놀고 있다. (중략) 노는 땅은 없다. 야생학교는 외친다.
-버스에 앉아 억지로 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정글의 법칙>이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글의 법칙>은 진짜 정글의 법칙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정반대, 즉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정글' 프로그램이다. 궁극적인 야생의 자연왕국인 정글을 감탄과 경외의 자세로 조심스레 접근하기는커녕, 시시껄렁한 게임과 가짜 서바이벌의 장으로 전락시키며 매회 정글을 유린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잡아먹을' 거리이다. (중략) 생물다양성이 가장 우수한 천혜의 자연에서 불필요한 사냥, 채취, 훼손을 일삼으며, 하나하나가 긴 진화적 과정의 작품인 개성 어린 생물을 향해 그저 입맛만 다시는 수준의 내용으로 일관하는 이 프로는 정글을 논할 자격이 없다.
-수년간 정글에서 살았기 때문에 진짜 정글의 법칙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정글의 법칙은 바로 종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아무리 다양해봤자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이다. 반명 정글은 다양한 생물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정글의 법칙은 단일종이 절대 한 가지 삶의 방식을 우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그것이야말로 생명인 곳이 바로 정글이다. 그런데 인간은 정글에 정글이라 부를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먹는 아이스크림, 라면, 과자에 들어가는 팜유를 생산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벌목하고 팜이라는 단일종만 사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이렇게 단일종만 자라게 하는 것은 정글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세 번째 정글의 법칙은 가장 창조적이고 독특한 생물이 산다는 것이다. 성공만 하면 장땡이라고 뻔뻔스럽게 구는 한 종의 생물만 사는 도시와는 달리 정글에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아간다. 그 예로 라플레시아가 있다. 라플레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큰 꽃 중에 하나다. (중략) 라플레시아는 꽃이 피자마자 신체가 석는 냄새가 난다. (중략) 이렇게 해서 라플레시아는 전혀 다른 택배 서비스인 파리를 불러 모은다.
(중략) 우리는 정글을 이야기할 때 보통 경쟁만 강조하기 쉽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적자생존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정글에는 공생관계도 넘친다. 공생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공생하는 관계도 있다. (중략) 정글에 경쟁만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친환경적인 생태관광 산업은 관광시장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그냥 보는 행위 자체가 핵심적 재미인 탐조활동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취미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세는 한 마리라도 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초장에 찍어 먹어야 비로소 흡족해진다. (중략) 모두가 사냥에 혈안이 된 현장을 '축제'라 부르는 것이 극소수에게만 이상하게 들리는 것인지, 야생학교는 어리둥절하다.
-대지를 촘촘히 수놓은 거미줄 같은 도로망은 어떻게든 최단 직선거리로 이동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물론 이 화려한 교통 인프라는 오직 인간만을 위한 왕도이다. 자연은, 멀리 돌아가야 한다. 아예 돌아다닐 생각을 말거나, 가뭄에 콩 나듯 놓인 좁다란 생태통로를 이용하라는 뜻이다.
-정신은 잘 보이지 않고, 말초적 감각만 눈에 띈다. 외출을 해보라. 식욕과 성욕, 그리고 소비욕의 코드를 꽂을 콘센트만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먹기에 대한 열기가 가장 기세등등하다. 어느새 문화가 깃들었던 것은 모두 먹을거리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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